루브르 박물관 미술작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루브르 박물관 미술작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페로니에르를 한 아름다운 여인’은 그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작품에서의 모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일부 추측에 따르면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활동할 당시 도시 수장 루도비코 일 모로의 정부인 루크레치아 크리벨리나를 그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루브르 박물관 미술작품

페로니에르를 한 아름다운 여인

 

루브르 박물관 미술작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페르니에르를 한 아름다운 여인

 

이 작품은 “라 벨 페로니에르(La belle ferronnière)”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이 그림 속 여성의 이마에 착용한 아름다운 철 장신구를 “페로니에르(ferronnière)”라고 부르는데, 이는 여성의 결혼 상태를 나타내는 예쁜 장신구로 여겨졌습니다.

검은 배경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서 여인은 정면이 아닌 살짝 비틀린 자세로 그려져 있어 자연스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하단의 창틀은 마치 그림 속의 여인이 창 밖에서 발견된 듯한 착시 효과를 주어 작품에 독특한 분위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여인의 시선은 살짝 향하고 있어 고요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인의 눈, 코, 입술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을 매우 정교하게 표현하며,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완벽한 윤곽을 그려내었습니다. 이 작품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녀의 성격에도 깊이를 부여한 것으로 인상적입니다.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로,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후원을 받아 밀라노로 이동하여 스포르차 가문의 루도비코 일 모로를 위해 일했습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는 피렌체의 중요한 후원자로써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레오나르도의 창조적인 면을 간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렌초는 단순히 레오나르도를 화가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업적에 주목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악기 발명가, 음악가, 축제 및 공연 기획자, 해부학자, 동식물학자 등 다방면에 걸친 다재다능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로렌초가 그를 밀라노로 보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레오나르도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림 외에도 예술가의 다양한 재능과 지적 호기심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몇 년을 보낸 후, 프랑스 왕가의 부름을 받아 프랑스로 이동했습니다. 그 후로도 밀라노로 돌아와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St. Anne)를 그리는 등 다양한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이때 그린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에서는 마리아를 무릎에 앉힌 모습을 그렸습니다.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지만,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와 아기 예수를 통해 가족의 품안에서의 안정감과 인간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가 양을 잡고 있어 자신이 인류를 위한 희생양임을 상징하는 듯한 모습이 특징적입니다.

 

세례 요한(바쿠스)

 

세례 요한(바쿠스)
세례 요한(바쿠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중에는 두 작품 모두 세례 요한을 그린 것이지만 그림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두 작품에서 꽃미남으로 묘사된 세례 요한은 그리스 신화의 술과 축제의 신인 바쿠스(또는 디오니소스)와 관련지어지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
세례 요한

 

한편으로는 세례 요한이라고 알려진 인물을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세례 요한의 외모가 여성적이며, 특히 두 작품에서의 세례 요한은 꽃미남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성을 꽃으로 비유하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남성에게 ‘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생애 동안 독신 생활을 택했으며, 동성애적인 경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476년에는 동성애 관계에 휘말려 법정에 출두한 적도 있습니다. 밀라노에서 머무르던 시절에는 루도비코 일 모로의 후원을 받아 예술가로서 활동했고, 그와의 관계를 통해 여러 측면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두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는 세례 요한과 바쿠스의 복합적인 의미나 레오나르도의 동성애적 경향이 작품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적 창의력과 독특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모나리자

 

모나리자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두 번째 밀라노 체류는 프랑스 왕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밀라노가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로 돌아가면서 레오나르도는 잠시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도착 후 교황 레오 10세와 메디치 가문 출신의 추기경 등 다양한 후원을 받으며 바티칸에 입성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바티칸에 도착한 시점에서는 이미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리고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완성한 직후였습니다. 이 당시 바티칸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구 최고의 예술가들로 붐볐으며, 이는 경쟁과 반목이 극심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대형 벽화를 그리는 대신 <세례 요한(바쿠스)>와 같은 작품을 통해 해부학 등 다양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후원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사망 이후, 레오나르도는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를 예술가, 건축가, 그리고 공학자로 추켜세우며 그를 앙부아즈 인근의 클루 성으로 모셨습니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클루 성에서 머무는 동안 제작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제작 연도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한 여러 가설이 존재합니다.

1625년, 퐁텐블로에서 작품을 직접 본 카시아노 달 포초가 작품을 ‘라 조콘다’라 명명한 것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이 조콘도 부인인지 여부에는 여전히 논쟁이 있습니다. 1517년에 클루 성에서 레오나르도를 만난 한 추기경이 언급한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와 <세례 요한(바쿠스)> 등의 작품에서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부인의 초상화가 나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그녀는 메디치 가문과 관련된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여러 면에서 그의 예술적 혁신과 창의성을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먼저, 이 작품에서 얼굴이 정면에 가깝지만 몸은 살짝 돌려져 있어 자연스러운 자세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는 몸을 살짝 틀어도 느껴지는 자연스러움의 차이를 강조하며, 서양인들의 증명사진에도 나타나는 어떤 면에서의 현대적인 미감과도 연결됩니다. 몸의 살짝의 회전이 전체적인 조화를 높이고 관객과의 소통을 도모합니다.

둘째로, 레오나르도는 윤곽선을 흐리게 처리하여 인물의 표정과 외관을 자연스럽게 잡아냈습니다. 눈, 코, 입술과 같은 얼굴의 부분은 뭉개듯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어 현실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전달합니다. 이 기법은 관객에게 더 많은 상상력을 부여하고, 인물의 내적 감정을 강조합니다.

셋째로, 레오나르도가 사용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은 작품에 공기 원근법을 불어넣어줍니다. 가까운 곳의 사물은 색이 짙고 윤곽이 선명하지만, 멀리 있는 부분은 옅어지고 흐릿하게 보입니다. 이는 거리에 따라 시야의 선명도가 변화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레오나르도의 기법적 혁신은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모나리자>는 당시에 비해 새로워 보이지 않을지라도, 당시 레오나르도의 혁신적인 시도가 얼마나 놀라웠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